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역시 마이클 슈어는 웃기고(이건 내가 당연히 기대한 부분이다) 이 책은 웃기면서도 실용적인 가이드다(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무를 지고 있음을 기억하기. 윤리적 선을 그으려는 노력은 단연코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포기하지 않기. 나를 알고,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기(타투를 할 생각은 없다).
🔖 스캔론은 사람들에게 번영에 다다른 성인군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의 성격이나 종교, 정치 신념, 피자 토핑 선호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모두에게 정당한 삶의 기본 규칙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계약주의가 칸트의 의무론보다 내 마음을 더 끄는 이유 중 하나다. 칸트는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 을 내려놓고 명상을 위한 독방 같은 곳에 혼자 들어가 문제를 마주하고 순수이성으로 보편 준칙을 찾아 내 문제에 적용한 뒤 그 준칙을 따르려는 의무감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스캔론은 이 모든 것을 같이하라고 한다. 서로 마주 앉아 “이렇게 하는 데 동의하나요?”하고 묻는 것이다. 스캔론은 추상 추론을 믿지 않는 대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물론 좀 위험해 보일 수도 있다. 자기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규칙을 만드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스캔론은 사람에게 하듯 다람쥐에게 말을 거는 옆집의 신디나 꽁꽁 얼어붙은 수영장에서 다이빙해 꼬리뼈가 부러진 사촌 데렉이 와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2023년 상황에 비춰보자면 그 정도가 아니라 음모론을 퍼뜨리는 페이스북 요정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인 증조 삼촌처럼 당신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합리성'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다. 허용하는 행동에 관한 규칙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거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반대하는 근거가 합리적이고 다른 사람들만큼 자기 이익을 위한 욕구를 억누른다면 가능하다. 물론 이상하고 신경에 거슬리며 예측 불가능한 사람 도 있지만 결국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을 배제하고 추상적 법칙을 정하는 것보다 그들과 협력해 세상의 도덕적 경계를 그리는 것이 낫다고 본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협력하는 것이 더 좋은 생각일 것이다.
(…)
스캔론은 우리와 지구를 함께 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당신이 저를 우리 시스템을 거부할 권한이 있는 중요한 사람으로 대한다는 걸 압니다. 저 역시 당신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스캔론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는 윤리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도덕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우분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내면의 이기주의에 제동을 걸고 주변 사람(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통틀어)과의 관계를 개인적 ‘선량함 계량기’의 중심에 두게 한다. 일단 이 입장을 받아들이면 음...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쓰자면, 멍청한 채로 살기는 힘들어진다.
🔖 마침내 스캔론이 계약주의에 관한 초본을 데릭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팀, 이건 윤리 이론이 아니잖나. 이건 자네 성격을 기술한 거잖아.” (철학자는 가끔 재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결정과 다른 사람의 결정에 보이는 내 반응을 비교해볼 때 계약주의는 윤리적 가이드로 의지할 만하다. 그래도 기억해야 할 것은 계약주의는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선만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 최소한의 기준선에 도달했을 때 자신과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자 좀 더 수고를 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 내가 스캔론의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에 그토록 크게 공감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제목 자체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안내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무를 질까?'가 아니고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이다. 이 책은 우리가 분명 서로에게 의무를 진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며 그 의무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트레스와 고통, 불평등과 부당함, 윤리적 긴장과 피로감으로 분열된 나라 상황에서 설령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원정에 실패하더라도 자신을 좀 너그럽게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무를 진다.
🔖 그 선을 긋는 순간 모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 분명하다. 두 예술가의 행동이 얼추 비슷한데도 이 사람은 계속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떨쳐내는 탓이다. 당신 친구들은 방방 뛰고 웃으면서 왜 이 영화는 보면서 저 영화는 안 되는지, 왜 이 야구 선수는 응원하면서 저 선수는 비난하는지 지적해댈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전체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감각인 도덕적 완결성을 이뤄가는 작업을 그만두면 안 된다. 모순을 발견하면 되돌아가 더욱 파헤치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필요하면 처음 그은 선을 지우고 다른 곳에 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우리 자신의 완결성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 덕분에 우리는 자기 신념과 윤리를 이해하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한 결정을 내리도록 다시 한번 시도할 기회를 얻는다. 명확한 해답도 없고 경험으로도 알 수 없으며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론상의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실패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는 때다.
🔖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치심이 부족하거나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은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코니 이모를 사랑하고 신경 쓴다면 이모가 무언가 부끄러운 말을 했을 때 조금이라도 수치심을 느끼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모가 번영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역시 알맞은 상황에서 알맞은 양의 화를 표출하는 온화함의 중용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덕 윤리학자는 중용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안다. 녹초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지금쯤 누구나 번영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추수감사절 저녁 중간에 일어서서 ‘이모는 구제 불능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선언하지는 않더라도 나중에 이모를 따로 불러 그 관점이 왜 틀렸고 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지 설명할 수 있다. 이모가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을 살펴보고 그 근원을 찾아 이모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도 있다. 이모가 그냥 의견을 말한 것뿐이라거나 농담이었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런 말이 우리의 관계를 망칠 수 있고, 이모가 그런 말을 할 때 침묵을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완결성을 위협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마음속에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사람은 나를 화나게 한다.
이 두 가지 다른 생각에 중요도를 똑같이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 그 사람 역시 그렇게 하길 희망한다.
🔖 너 자신을 알라.
지나치지 말 것.
솔직히 말해 이러한 ‘삶의 조언’ 시리즈가 존재해온 이래 지난 2,400년간 이 두 가지를 이긴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너 자신을 알라. 네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무언가를 할 때면 그것이 옳은 결정인지 자신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온전한 존재로서 너 자신을 이해하며 그에 맞는 삶을 살라는 거야.
지나치지 말 것. 무엇이든 지나치면 (또는 부족하면) 일을 망치고 만다. 친절이나 관대함, 용기 같은 덕을 쌓되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위스키를 마시게 되겠지.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그나저나 싱글 몰트로만 마시는 것이 좋아. 이것저것 마구 섞은 쓰레기 말고). TV도 너무 많이 보지 말고. 타코를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돼. 운동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오히려 해롭고 욕을 너무 많이 해도 안 좋다(내가 이게 문제야). 덕을 찾는 것이나 너희가 하는 행동의 중간 어디쯤에 딱 알맞은 정도가 있단다.
그것을 찾는 게 너희가 할 일이야. 선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정한 요약본을 원한다면, 팔에 타투로 새겨넣어도 아직 자리가 많이 남을 만큼 함축적인 안내문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것이다.